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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는 대한민국 프로 축구 리그 시스템의 최상위에 위치한 K리그1과 K리그2를 통칭하는 이름입니다. 1983년 대한축구협회 주도로 “수퍼리그”라는 명칭으로 시작되었으며, 2018년에는 K리그1과 K리그2로 구성되었습니다.
이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리그는 1972년까지 실업축구와 대학리그 토너먼트가 중심이었으며, 1964년부터 열린 전국실업축구연맹전이 1부 리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83년 2월 28일 대한축구협회가 수퍼리그 창설에 합의하게 되었고, 3월 3일에는 ‘수퍼리그 위원회’가 발족하여 실제 창설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수퍼리그는 5개의 프로축구단 할렐루야, 유공과 3개의 실업축구단 포항제철, 대우, 국민은행으로 시작하여 5월 8일에 개막전을 통해 공식 출범하였습니다.
2000년에는 지역 연고지 제도가 도입되어 성남 일화 천마로 구단명이 변경되었습니다. 2002년 FIFA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2003년 최초의 시민구단 대구 FC가 리그에 참가하였습니다. 2012년에는 K리그 팀 개수를 12개로 축소하고, 4개의 팀을 프로 2부리그로 강등시켜 승강제 시스템을 도입하는 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2013년 3월, 최상위 1부 리그의 명칭이 K리그 클래식, 2부 리그의 명칭이 K리그 챌린지로 변경되며, 승강제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K리그 관련 정보
한국 프로축구 리그가 1983년 처음 시작할 당시 공식 명칭은 “슈퍼리그”였습니다. 그러나 1984년 정부는 외래어 사용이 지나치다고 지적하며 “슈퍼리그” 대신 “축구대제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 해 만에 “축구대제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부명칭으로 “슈퍼리그”를 병행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987년에는 대한축구협회에서 프로축구위원회를 발족시켜 프로 리그 운영을 독립적으로 처리하게 되었고, 실업 구단과 프로 구단이 함께 참가했던 리그를 이후부터는 오직 프로 구단만 참가할 수 있도록 규정을 변경하면서 리그의 공식 명칭을 “한국프로축구대회”로 변경하였습니다. “한국프로축구대회”라는 명칭은 1987년부터 1993년까지 사용되었으며, 1994년부터는 “코리안리그”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그러나 “코리안리그”라는 명칭은 1994년과 1995년 두 해 동안만 사용되었고, 1996년과 1997년에는 다시 “한국프로축구대회”로 명칭이 변경되는 등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후 1998년에 “K-리그”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2010년부터는 “K리그”로 다듬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K리그”는 코리안리그의 공식 약칭이 아닌 독립적인 공식 명칭입니다.
한편, K를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수식어 명명법은 1980년대부터 국군에서 국산 제식무기와 장비에 “Korea”의 앞 글자인 K를 붙여 명명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국내에서도 낯설지 않은 방식이었습니다. 1998년에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언론과 여론을 고려하여 “K리그”를 새로운 리그 명칭으로 수용하였고, 이로써 우리에게 잘 알려진 “K리그”가 되었습니다.
K리그는 단일 리그였으나 2012년에 승강제를 도입하고 2013년에 2부 리그를 창설하며 두 디비전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디비전이 두 개로 나뉘면서 1부 리그와 2부 리그의 새로운 명칭을 정하게 되었는데,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K리그의 명칭은 그대로 사용되었으며, 1부 리그는 “K리그 클래식”, 2부 리그는 “K리그”로 명명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K리그”라는 명칭은 2부 리그에는 사용되지 않고 상위 리그의 명칭으로 유지되었습니다.
2018년에는 1부 리그와 2부 리그의 명칭인 “K리그 클래식”과 “K리그”가 각각 “K리그1″과 “K리그2″로 변경되었습니다. 이 변경은 대한축구협회가 구축하고 있는 프로 리그(K리그1, K리그2)-세미프로 리그(K3리그, K4리그)-아마추어 리그(K5리그, K6리그, K7리그)를 연결하는 디비전 시스템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리그의 명칭에 디비전 숫자를 넣어 한국 축구의 디비전 시스템을 직관적이고 명확하게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요약하면, 한국 프로축구 리그의 명칭은 슈퍼리그부터 축구대제전, 한국프로축구대회, 코리안리그, K-리그를 거쳐 현재의 K리그로 변화하였습니다. “K리그”는 코리안리그의 약칭이 아니라 독립적인 공식 명칭입니다.
연고지 제도
K리그에서 공식 지역 연고제가 처음 시행된 해는 1987시즌부터입니다. 원년인 1983시즌부터 1986시즌까지는 구단들이 연고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홈 앤드 어웨이 리그 시스템이 아니었으며, 각 라운드 경기들을 전국 여러 도시에서 개최하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1984시즌에 신생 구단 현대와 럭키금성이 리그에 참가하면서 연고지 배분에 일부 조정이 이루어졌습니다. 할렐루야의 강원+충남+충북 연고지는 분할되어 할렐루야가 강원 연고 구단, 럭키금성이 충남+충북 연고 구단이 되었습니다. 또한 유공의 서울+인천+경기 연고지는 분할되어 유공은 서울 연고 구단, 현대는 인천과 경기 연고 구단이 되었습니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광역지역 연고제가 시행되었는데, 이때 연고지역을 부산+경남, 대구+경북, 인천+경기, 충청으로 나누어 표기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연고지는 부산, 대구, 인천, 대전을 의미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모든 구단들은 연고지 내에서 홈 경기를 개최하고, 중립 도시에서의 유랑 극단 경기를 최소화하여 지역 연고 정착을 추진했습니다.
1987시즌부터 공식적으로 시행된 광역지역 연고제는 흥행을 높이기 위한 시도였으나, 이미 1982년부터 홈 앤드 어웨이 시스템을 채택하여 강력한 지역 연고 정착 정책을 가진 프로야구단들에게 밀려 기대한 효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1987년에는 프로야구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연고지인 부산, 대구, 인천, 대전을 광역지역으로 지정하였으나,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축구 경기장으로 지정된 것으로 인해 연고지 구단들이 홈 경기를 개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89년에는 광역지역 연고제가 도시 지역 연고제로 전환되었으며, 1990시즌부터 이 형태로 공식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1996년에는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 시행되어 서울 연고 구단들이 지방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구단명에 지역명을 의무적으로 포함시키는 규정이 생겼습니다.
K리그 인기
코로나19 이전에 한국 축구는 서서히 봄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20년부터 코로나19로 인해 관중이 경기장을 찾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2023년부터는 정말 완벽한 K리그의 봄이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K리그1 경기장에서 1만 관중이 차있는 것이 특별하지도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각 팀마다 스토리를 쌓아온 2부 리그 팀들도 매 경기마다 수천 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습니다. 이로써 축구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야구만 관심있던 내 친구도 이제는 여자친구와 함께 델브리지, 제르소 유니폼을 입고 매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 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도 K리그 티켓 예매에 대해 물어보는 경우가 늘어났습니다.
치열한 순위 경쟁과 각 팀의 스토리가 축적되었고, 여기에는 스타 선수들의 등장도 더해져 있습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몇 차례 흥행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한국 축구는 이 사이에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제법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유소년 축구 육성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것은 앞으로 한국 축구가 희망적인 발전을 거듭할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제는 K리그 경기장을 방문할 때 교통체증과 주차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2006년부터 이런 날이 올까 싶었던 마음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마치 예전에 독립을 기다렸다가 광복을 맞은 듯한 느낌입니다. 이런 변화에 너무나도 감사하고 기쁩니다.
몇 년 전에 ‘한국 축구가 망하는 법’이라는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한국 축구는 몇 번의 흥행 기회마다 관중과 선수, 심판 등의 논란으로 인해 흥행 기회를 놓쳤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일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각종 문제로 인해 흥행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한 노력들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발전하는 K리그, 하지만 여러 문제들이 남았다.
올 시즌에는 정말 다르다. 이는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 성과에 바탕을 둔 것일지라도, 그 이상으로 한두 국가대항전의 붐과는 다른 긍정적인 변화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의 준비가 이제야 결실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즌은 KBO리그 중계로 인해 중계 영상을 찾기가 힘들었던 시기를 지났으며, 이제 연맹이 자체적인 방송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중계를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은 더 이상 아닙니다. 2010년에 KBS의 <비바! K리그> 프로그램에 출연하던 당시 PD는 경기장에 카메라를 여러 대 배치하여 모든 득점 장면을 찍으려고 했으나, 가끔씩은 여전히 찍히지 않는 골 장면이 발생했습니다.
이제는 중계에 대한 불평은 들리지 않습니다. 중계 수준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중계가 없었던 시기는 이미 옛날 일처럼 느껴집니다. 팬들은 거리로 나와 승강제도를 위해 싸웠고 연맹 또한 기득권 세력과의 경합을 거듭하며 이를 성취했습니다. 이로 인해 FC 서울과 수원 삼성과 같은 영원한 강자들도 강등 위기를 경험하며, K리그의 경쟁력이 한층 높아졌습니다. ‘대대강광’ 중에 위치하던 강원FC를 제외하고도 리그 전체적으로 큰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이동국만이 최고의 스타였던 시기는 지나치고, 새로운 스타 선수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행의 성공을 찾아가려는 도중 악재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룩한 K리그 인기인지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서는 한숨이 나올 정도입니다. 에이전트와 구단 고위층의 뒷돈 유착 사건이 드러나고, 선수들은 가끔씩 사회적 문제로 등장합니다. 심판들의 판정에 오심이 드러난 경우에도 심판진은 정당한 판정이라며 항의한 선수들에게 징계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팬들끼리의 충돌은 어느 정도 차단되어 다행스럽게도 더 큰 문제로 확대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악재들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때 물을 잘 저어야 할 때에도 노를 저어야 하는 이들이 오히려 노를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 K리그의 흥행을 간절히 원하던 때와는 달리, 이제 흥행이 시작되자 그 시절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